[유럽 도자기 여행⑩ - 러시아] 여제 시절 꽃피운 ‘황실 공방’

  • 입력 : 2017.07.10 14:31:49   수정 : 2017.07.11 17: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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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3대 박물관을 꼽자면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영국의 대영제국 박물관과 함께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있다. 그중에서도 에르미타주를 진정한 ‘최고’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루브르와 영국박물관은 제국시대의 침략과 약탈로 모은 전시물이지만, 에르미타주는 예카테리나 여제와 귀족들이 수집한 소장품들을 한데 모아 품격이 다르다는 시각 때문이다.

하지만 도자기 문화 측면에서만 본다면 에르미타주 박물관에는 러시아가 없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된 대부분의 도자기들은 타국의 유명 도자기이거나 동양의 도자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러시아 도자기를 보려면 황실 도자기 박물관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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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테리나 여제(왼쪽)와 엘리자베타 여제를 묘사한 피겨린. 모두 독일에서 제작했다. 최고의 권력을 누렸지만 그리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했던 이 두 여제는 도자기에서 위안을 얻었다. <사진‘유럽도자기여행’중에서>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답다

1743년 러시아는 스웨덴 왕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스톡홀름에 보낸다. 비슷한 시기 엘리자베타 여제의 시종이었던 바론 코르프도 은밀히 스톡홀름에 들어와 있었다. 그의 임무는 도자기 제조 전문가 크리스토프 헝거를 만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자기 공장을 세워주는 계약이었다. 1744년 스웨덴에 파견된 러시아군 사령관에게 여제는 두 가지 명을 내린다. 하나는 스톡홀름에서 철수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헝거의 가족을 러시아로 무사히 데려오는 것이었다.

크리스토프 헝거는 어린 시절부터 귀금속 세공을 배웠고 유럽의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마지막 정착한 곳이 드레스덴이었다. 그곳에서 유럽 최초의 경질 도자기를 만든 요한 뵈트거와 인연으로 도자기 제작 기술을 익혔다. 하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스톡홀름의 뢰르스트란드 도자기에서도 일했지만 그의 기술은 이곳에서도 역부족이어서 1733년 해고되었다.

베니스에 가서도 도자기를 만들었지만 역시 실패했다. 1737년에는 덴마크 왕에게 마이슨보다 잘 만들 수 있다며 실험작을 만들었으나 인상적인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이어 1741년에도 스웨덴 왕에게 제안했지만 뢰르스트란드 도자기의 방해로 이뤄지지 못했다.

사실 그는 일종의 사기꾼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그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군대의 보호와 재정적 지원까지 아끼지 않으며 그를 영입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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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4년부터 같은 자리에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실도자기제작소(왼쪽). 오른쪽은 1749년 드리트리 비노그라도프가 만든 도자기. <사진‘유럽도자기여행’중에서>



그는 몇 개월 동안 러시아 황실로부터 관대한 후원을 받았지만 도자기 공장을 세우는 진도는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래서 여제는 헝거를 도울 파트너를 구하도록 지시한다. 그 적임자로 드미트리 비노그라도프가 선택되는데, 그는 1736년 독일로 유학을 갔다 온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 아카데미 졸업생으로 헝거와의 소통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1744년 비노그라도프 주도로 드디어 ‘러시아 도자기 공방’을 설립했다. 공장은 네바 강 왼쪽 제방에 있었는데, 그때 만들어진 러시아 황실 도자기 제작소는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헝거는 운영자금에 손을 댈 수도 사용할 권리도 없었다. 또한 그의 요구들은 관리들에 의해 묵살되었지만 도자기를 만들 재료만큼은 구해주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제일 좋은 도구들을 수입해왔고, 작센으로부터는 수백 파운드의 코발트도 들여왔다. 당시 작센은 코발트 수출을 금지하고 있던 터라 러시아에서는 특별한 외교 채널을 동원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 황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결국 1747년 9월 급여 지급을 중단했고 이듬해 2월에는 러시아에서 떠나라는 통첩을 받았다. 4년 동안 그가 이룬 성과는 도자기를 만드는 데 거의 근접한 제조법, 모호하기 짝이 없는 가마에 대한 정보, 그리고 빈약한 품질의 도자기 컵 6개가 전부였다.

막대한 재정 지원과 시간을 투자한 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성적표였다. 그나마 독일, 오스트리아, 스웨덴에 이어 네 번째로 경질자기를 만든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정작 ‘하얀 금’ 도자기의 비밀을 밝혀낸 사람은 헝거의 파트너였던 비노그라도프였다. 헝거의 시행착오를 바로잡으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한 그는 1749년 무렵부터 독일 마이슨과 비슷한 자기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1750년대가 되면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양질의 피겨린을 만들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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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5년에 제작한 ‘예브게니 오네긴’. ‘예브게니 오네긴’은 푸시킨의 운문소설로, 차이코프스키의 유일한 오페라로도 만들어진 작품이다. <사진‘유럽도자기여행’중에서>



1765년에 공장은 ‘황실도자기제작소’로 이름을 정하고 가마도 새로 만들었으며, 베를린과 프랑스 세브르로부터 솜씨 있는 도공들을 초청했다. 황실로부터의 수요는 매우 넓은 데다 거의 영구적이었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시절은 러시아의 황금기로 시장은 무궁무진했던 것이다.

1806년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외국으로부터 도자기 수입을 할 수 없게 되자 민간 영역의 도자기 공장들과 황실 도자기 제작소간의 경쟁이 시작됐다. 또한 황실 도자기도 전적으로 황실에 납품하는 부분과 귀족 수요자를 겨냥한 생산품을 만드는 부문으로 나뉘게 되었다. 니콜라이1세 때에는 프랑스 리모주의 고령토를 수입해 사용했으므로 훨씬 더 품질이 좋아졌다. 니콜라이 1세는 황실 도자기 운영에 직접 개입해 자신이 허가한 제품만 만들 수 있게 했고, 1844년에는 전기로 하는 아말감 도금법이 개발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절의 황실도자기는 품질을 더 높이기 위해 외국에서 수입한 재료만을 가지고 작업을 했다. 1870년경부터는 유명한 옛 그림을 도자기 표면에 그리는 작업을 중단하고 풍경을 넣기 시작하면서 장식적인 치장이 지배적인 경향이 되었다.

1892년 이후부터는 덴마크 전문가의 도움으로 밑그림 칠에 대한 기술을 전수받게 된다. 이는 알렉산드르 3세가 덴마크 공주와 결혼해 이 기법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20세기 초에 이르면 황실 도자기 제작소는 유럽을 선도하는 도자기 브랜드 중 하나가 되었다. 이는 끊임없는 도구의 혁신과 좋은 재료로 이룩한 성취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에서의 도자기 수입이 끊어짐에 따라 핸드 페인팅이 아닌 기계로 찍어내는 도자기가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양질의 고급 도자기 생산은 급감했다. 그나마 고급 도자기는 황실 병원 재정을 돕기 위한 자선 경매에 모두 팔려 나갔고, 군인들을 위한 부활절 계란만 대량으로 생산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황실 도자기 제작소는 국영화되면서 국립도자기공장으로 바뀐다. 1925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창립 200주년을 맞아 국립도자기 공장은 아카데미 창립자인 미하일 로모노소프의 이름을 따서 ‘레닌그라드 로모노소프’ 도자기 공장으로 바뀐다. 로모노소프 도자기는 동물 피겨린과 디너 세트를 포함해 다양한 도자기들을 생산했다.

로모노소프 시절의 도자기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1949년에 나온 ‘코발트 그물’이다. 이 디자인은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오직 그녀만의 만찬을 위해 창조되었던 ‘핑크 그물’ 패턴에서 착안한 것이다.

1993년에는 다시 ‘로모노소프 도자기 공장’으로 민영화되어 대대적인 수출에 나섰다. 하지만 1999년 KKR이라는 미국 투자사가 로모노소프의 지분을 사들이면서 소유권을 놓고 러시아 정부와 법정 투쟁에 들어갔다. 결국 미국 투자사가 법적인 승리를 거두지만 미국 투자사가 옛 러시아 황실도자기제작소 시절부터 내려온 박물관 제품을 부정으로 약탈해 간 것이 드러났다. 러시아 정부는 박물관 운영권을 에르미타주 박물관에게 넘기도록 종용했고, 결국 투자사는 소유권을 포기했다. 이후 로모노소프 도자기는 2002년 니코일 그룹의 회장 니콜라이 츠베츠코프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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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페리얼 포슬린의 현대 도자기 작품(왼쪽)과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전시된 ‘코발트 넷’. <사진‘유럽도자기여행’중에서>



2005년 로모노소프 도자기의 주주들은 회사 이름을 소비에트 혁명 이전으로 돌리기로 결정하면서 다시 황실도자기 제작소(IPM)로 이름을 바꾸었다. IPM은 1744년 회사 설립 이후 만들었던 제품들을 선별하여 핸드 메이드로 다시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다.



[MK스타일 주동준 기자 / 도움말 : 조용준 (‘유럽도자기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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