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도자기 여행 ⓶ -오스트리아] ‘로열 비엔나’의 흥망성쇠

  • 입력 : 2017.06.08 10: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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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자기 여행의 두 번째 나라는 오스트리아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도자기 제작에 성공한 로열 비엔나의 전신, 아우가르덴 도자기 공장이 있다. 그 시작은 1717년부터이다.

▶아우가르덴 도자기의 초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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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황후라는 지위의 차별화를 위해 아우가르텐 도자기의 클래식 작품에 녹색 장미를 사용하도록 했다. 일명 마리아 테레지아의 ‘푸른 장미’ 시리즈. <사진. ‘유럽도자기여행’ 중에서>

마이슨 내부에서 도자기 제조 비법이 새어 나가기 시작할 무렵 근위대 근위관이였던 클라우디우스 인노켄티우스 두 파쿠이어는 마이슨에서 기술자를 빼내 비엔나 근교에 있는 로사우에 도자기 공방을 열었다. 하지만 빼온 기술자들이 전체 비법을 다 아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매우 좋은 조건으로 뵈트거의 조수로 일한 자무엘 슈텡겔을 영입한다. 그 결과 1719년 4월 로열 비엔나에서 제대로 된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마이슨에서 도자기를 생산한지 8년이 되는 해였다.

당시 오스트리아 대공 샤를 6세는 두 파쿠이어의 공로를 높이 사 그에게 도자기 전매권을 주지만 공방은 큰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 결국 영입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자 마이슨에서 데리고 온 기술자들은 로열 비엔나를 떠난다. 그중 한 사람이었던 콘라트 훙거는 베네치아로가 이탈리아 경질 자기 공방 설립하는 일을 도왔고 슈텡겔은 마이슨으로 복귀한다. 이때 슈텡겔은 마이슨에 배반한 게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젊은 화공 한명을 데리고 가는데 마이슨의 대표 상품인 쯔비벨무스터의 신화를 만든 요한 그레고리우스 회롤트였다. 남은 두 파쿠이어는 슬로바키아 출신 화공들의 뛰어난 밑그림과 성실함 덕에 로열 비엔나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영 실적은 점점 나빠져 결국 1744년 운영권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황실로 넘어간다. 여제는 황실 직영 도자기의 위상을 높이고 제품의 품질을 보장하려는 생각으로 파란색의 오스트리아 공작 문장을 도자기에 넣게 했다. 이 전통은 현재 아우가르텐 도자기에도 이어지고 있다.

▶로열 비엔나의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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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금박 광택 도자기는 19세기초에도 각광을 받았다. <사진. ‘유럽도자기여행’ 중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제위 시절과 그 사후 40년을 로열 비엔나의 2기로 본다. 이 시기는 로코코 양식의 화려한 로카이유 장식이 유행했다. 당시 요한 요제프 니더마이어라는 탁월한 성형가가 있었고 그의 뛰어난 감각으로 로열 비엔나의 피겨린은 유럽 최고가 된다. 1770년대 이르러 로열 비엔나는 프랑스 세브르 자기의 도전을 받게 된다. 세브르의 연질자기는 밝은 색채를 표현하는 데 뛰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로열 비엔나와 마이슨과 같이 경질자기를 생산하는 업체에서는 새로운 안료와 태토를 개발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다.

당시 도자기 화공 우두머리였던 요제프 라이트너는 알루미늄 황산염과 코발트 질산염을 단련하는 과정에서 코발트블루를 발견한다. 그로 인해 더 이상 코발트 블루를 수입하지 않고 인공 코발트 블루를 사용할 수 있게 됨으로 로열 비엔나의 기술 혁명을 이끌었다. 1780년 마리아 테레지아 사망 후 그의 아들 요제프 2세가 즉위하며 사회 개혁을 시작한다. 사치스런 연회나 허례허식을 배격한 그는 별 이득 없는 도자기 공장을 매각하기로 한다. 그 결과 린츠에서 직물 공장을 운영하던 콘라트 폰 조르겐탈에게 넘어간다. 이 시기 로열 비엔나의 기술혁명과 새로운 미적 기준의 적용으로 마이슨을 능가하는 명성을 얻게 되고 유럽의 공방은 로열 비엔나를 모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나폴레옹 군대가 로열 비엔나를 폐허로 만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로열 비엔나는 위기를 맞게 된다. 로열 비엔나를 위기에 몰아 놓은 건 나폴레옹이었지만 다시 중흥시킨 것 역시도 나폴레옹이다.

비엔나는 나폴레옹 전쟁 후 강화회의가 열리면서 외교 도시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지게 된다. 강대국 외교관들은 세력 균형을 위해 다자간 공식 만찬에 끊이지 않고 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들의 식탁에 오를 고급 도자기의 수요가 급증했고 그로 인해 로열 비엔나는 다시금 부활하게 된다. 또한 고급 도자기는 외교에 필요한 선물로도 최상의 가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로열 비엔나의 위상으로 인해 프러시아의 황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 같은 초특급 고객들이 공장을 방문하는 사태도 벌어진다.

▶ 아우가르텐의 파란만장한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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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가르텐에서 내놓은 실험적인 피겨린 작품. 현대여성의 고뇌와 고다한 일상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사진. ‘유럽도자기여행’ 중에서>

19세기 초반 비더마이어 시대가 열리자 로열 비엔나도 변신을 꾀한다. 소비층이 귀족에서 부르주아로 변화한 것이다. 신흥 부자들이 도자기 구매에 몰두하면서 당시 ‘비엔나 로즈’는 영원한 클래식으로 굳어져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시장 변화이 변하면서 일반 식탁에 오를 테이블웨어 시장에서 외국 브랜드에게 밀리게 되고 1864년 결국 문을 닫게 된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1924년 로열 비엔나는 아우가르텐 궁전에서 아우가르텐 도자기로 거듭난다.

오스트리아 황실을 비롯해서 유럽 각국의 왕가에 도자기 제품을 납품하며 미국과 일본 등에도 영역을 확대해간다. 20세기 후반에는 매년 수만 명의 미국과 일본 관광객이 아우가르텐 공장을 방문하기에 이르렀지만 2003년 7월 법원에 파산 신청을 낸다.

파산에 대해서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관련 전문가들은 아우가르텐이 과거의 명성에 안주하며 신흥 소비계층의 구미에 맞추지 못한 것이 몰락의 실제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19세기 초 비더마이어 시대에 신흥 중산 계급의 상징과도 같던 아우가르텐이 21세기에 들어 신흥 소비계층의 취향을 맞추지 못했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MK 스타일 주동준 기자/ 도움말 : 조용준 (‘유럽도자기여행’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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